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툰쿠 압둘 라만 (문단 편집) == 업적 == 오늘날 말레이시아에서는 후임자인 [[압둘 라작]]과 더불어 [[국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특히 툰쿠는 그 중에서도 '''독립의 아버지'''(Bapa Kemerdekaan)라고 불린다. 툰쿠의 몇 가지 업적을 꼽자면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독립 운동"이다. 라작과 함께 툰쿠는 말라야를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큰 노력을 다했으며, 이후 영국과의 협상을 거쳐 말라야는 1957년 8월 31일을 기해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이 외에도 오늘날 말레이시아가 있도록 해 준 장본인이 바로 툰쿠인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본디 툰쿠는 말라야의 독립을 주도한 사람이었고, 말라야의 총리로서 식민지 시대의 청산과 민족의 자주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말라야는 [[한반도]]처럼 주변국들이 말라야보다 더 크고 국력이 더 셌다는 문제가 있었다. 안 그래도 독립 1년 전 [[인도네시아]]가 무주지였던 [[나투나 제도]](그것도 말라야와 보르네오 사이에 있었다)를 불법 침공해 점거하면서 말라야는 지리적, 안보적 위험에 처해 있었다. 당연히 이런 말라야로는 국제 무대에 서는 것이 불가능했고, 때마침 보르네오 북부의 사라왁, 사바, 브루나이, 그리고 말라야에 편입되지 못한 싱가포르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다. 또한 이 곳의 주민들도 경제적 향상을 원하고 있던 참이라, 툰쿠 입장에서는 같은 상황에 처해있는 이들 모두의 공통점을 이해하고 현재 말레이시아를 건국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당초 사라왁과 사바는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처음에는 반대했고, 브루나이는 강하게 찬성했으나 대신에 내부 좌익 세력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일단 사라왁과 사바는 일병 "코볼드 위원회"를 설치해 이들 주민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찬성이 압도하면서 이들의 가입은 확실했다. 허나 브루나이는 총선을 치렀는데 좌익 성향의 인민당이 압승하면서 가망이 없어졌고, 무엇보다도 브루나이가 요구한 자치 사항이 말라야 입장에서도 나름 위험하게 판단되어, 브루나이는 가입을 포기한다. 싱가포르는 무난히 가입했지만, 민족 구성 면에서 너무나도 달랐고(말라야는 말레이인 중심, 말레이시아는 부미푸트라 중심, 싱가포르는 중국인 중심), 결국 이를 버티지 못하고 1965년 8월 9일 연방에서 쫓겨났다. 여기서 생각처럼 강한 리더쉽을 발휘하지는 못 한 점은 아쉽고, 무엇보다도 훗날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를 압도하는 선진국으로 번창하기는 했으나, 인종적 문제를 우려한 말레이시아 입장에서는 그리 고깝게 여기지 않았다. 라만 정권은 민족 분쟁의 시초라는 위치에 있었는데, 말레이인은 다수 민족이었으나 중국인에게 경제적으로 밀렸고, 말레이인들을 중심으로 중국인이 힘이 세지는 것을 심히 우려했다. 이를 감안한 라만은 중재에 들어가면서도, 말레이인을 일부 우대하면서 민족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심히 아쉬웠다. 중국인의 반발은 매우 심했고, 결국 싱가포르의 탈퇴로 이어졌으며, 이 중에서 라만을 극도로 반대하던 일부를 중심으로 [[민주행동당]](DAP)이 창당되었다. 수뇌부인 [[림킷시앙]]은 형식상 "인종간의 평등"을 주장했으나, 뒤에서는 반말레이 사상을 선동했으며, 궁극적으로 그의 구호 중 하나였던 "말레이시아인의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인 우선"은 전형적인 파쇼 냄새가 강한 선동구호였다.[* 당장 일제가 2차 세계대전 전후로 아시아를 정복하면서 "아시아인의 아시아"라는 구호로 사람들을 선동시켰다.][* 훗날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인 [[마린 르 펜]] 또한 "프랑스 우선주의"를 내세우거나,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것을 보면 극우 냄새가 강한 것은 맞는 말이긴 하다.] 결국 중국인 유권자들의 반란 속에서 1969년 총선은 DAP의 약진으로 이어졌고, 이를 틈 탄 DAP는 [[5.13 사건]]이라는 인종 폭동을 주도했다. 라만은 빠르게 수습에 들어갔으나,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이 당시의 계엄령 선포는 훗날 그가 독재자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나라가 어수선한 상태였으므로 계엄령은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만으로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으나, 약한 리더쉽은 당 내에서 회의적으로 보는 원인이 되었고, 결국 1970년 총리직을 사임해야만 했다. 여담으로, 사임 당시 군주는 '''자신의 [[조카]]'''인 [[압둘 할림]]이었다. 압둘 할림의 아버지가 툰쿠의 배다른 형제이다. 이처럼 인종 간의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독립 운동을 주도하고 무엇보다도 현대 말레이시아를 건국한 국부로서 라만은 온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